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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벼랑위의 포뇨' 후기 <미야자키 하야오 결말해석 넷플릭스 애니추천 지브리>

by 소소한소소원 2024. 1. 15.

벼랑위의 포뇨

줄거리

호기심 많은 물고기 소녀 '포뇨'는 따분한 바다 생활에 실증을 느끼고, 급기야 아빠 몰래 늘 동경하던 육지로 가출을 감행한다. 해파리를 타고 육지로 올라온 '포뇨'는 그물에 휩쓸려 유리병 속에 갇히는 위기에 처하게 되고 때마침 해변가에 놀러 나온 소년 '소스케'의 도움으로 구출하게 된다. '소스케'와의 즐거운 육지 생활도 잠시, 인간의 모습을 포기하고 바다의 주인이 된 아빠 '후지모토'에 의해 결국 '포뇨'는 바다로 다시 돌아간다. 하지만 여동생들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한 '포뇨'는 소녀의 모습으로 변해 거대한 파도와 함께 '소스케'에게로 향하는데, 과연 포뇨는 어려움을 뚫고 소스케를 다시 만날 수 있을건인가? 

'동심이 사라진 후 보면 마냥 귀엽지는 않아'

이 영화가 개봉한 건 2008년 쯤이었는데 일본에 대지진이 일어나 쓰나미가 휩쓸고 가기 전의 영화였다. 쓰나미가 온 뒤에는 개봉하기 힘들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냥 귀엽기만 했던 포뇨의 존재가 공포스럽게 느껴졌고 쓰나미를 몰고 올까봐 인면어를 두려워했던 할머니라던가 물귀신이 쫓아 오는 것 같다는 엄마의 말이 10년후 재관람을 통해서야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소스케를 만나기 위해 포뇨가 파도를 일으키지만 여전히 두 아이들은 해맑기만 하고, 온 마을이 다 잠겼지만 전혀 게의치 않는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난 후 사람들의 비참한 현실을 보면 과연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런 아기자기한 쓰나미 애니를 만들 수 있었을까 싶었다. 

터널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을 보면 터널이 종종 나온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도 터널을 지나자 부모님이 돼지로 변해버린 가게와 온천이 나온다. '미야자키'의 영화 속에서는 터널이 삶과 죽음의 경계라는 느낌을 받았다. 거대한 쓰나미가 일어난 후 두아이들이 마을사람들과 엄마를 찾으로 터널을 지나는데 마을 사람들을 포뇨의 엄마가 구해준것 같지만 사실은 모두가 죽은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보는사람마다 느끼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이게 맞다 라고 정확하게 이야기 할 수 없지만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아무리 만화라도 살아남기 힘들거라 생각했다. 

애매모호한 악당과 자연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에서는 절대 악이 없다. 악당이라고 해도 어딘가 빈틈이 있고 어리숙한 느낌이 있다. 그게 장점이자 단점이다. 물론 이 영화에서는 장점으로 작용했지만 다른 지브리 영화를 보면 전쟁을 일으킨 쪽이 미화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에 단점으로 작용할 때도 있다. 포뇨의 아버지가 악당으로 나오는데 궁극적으로 역시나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바다 속에 있는 극도로 혐오하고 깨끗한 걸 좋아했다. 지브리의 모든 영화는 자연 친화적인 걸 강조한다. 이 영화 역시 환경파괴에 대한 경각심과 자연보호에 대한 메세지를 담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귀엽게만 봤던 포뇨가 다시보니 민폐스럽게 느껴지는 영화였다. 특히 파도를 타고 '소스케'를 향해 달릴 땐 공포스럽기 까지 했다. 넷플릭스에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를 도장깨기하듯이 다시 보고 있는데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에 움직이는 성' 에 비한다면 조금 아쉬운 영화였지만 그래도 명작임에는 틀림없다. 지브리 특유의 애니 먹는 모습도 볼 수 있고, 성우들의 목소리도 귀엽다. 또 지브리의 단짝 히사이시조의 OST도 빼놓을 수 없다. 히사이시조의 명곡들로 인해 더 빛이 나는 영화인 것같다. 가족영화로도 손색이 없으니까 꼭 추천한다. 

영화 리뷰

뭘까, 이 새로은 느낌은? 분명히 오래전에 봤던 영화가 맞나 싶은 <벼량위의 포뇨> 오늘 넷플릭스로 다시 본 '포뇨'는 이전에 본 애니메이션과는 차이가 있었다. 물론 넷플릭스에서 정제된 자막과 선명한 화면도 큰 역할을 했겠지만 이 애니메이션에는 자연과 인간이 하나되는 합일의 경지, 물아일체의 환희가 담겨있었음을 깨닫게 됐다. 이런 말이 떠오른다. "새는 알을 뚫고 나온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다. 이 만화는 사랑을 위해 새롭게 태어나는 생명이 세계를 파괴하는 엄청난 과정을 그렸다. 바다를 관리하는 에너지를 빼내자 세상은 노아의 홍수때처럼 물 속에서 뒤집혔다. 포뇨의 사랑의 힘은 그토록 간절했다. 바다는 대자연이다. 자연은 인간의 지배의 대상이지만 인간을 공격하기도 한다. 그런데 바다와 인간을 엮는 이 판타지는 해상재난으로부터의 안전을 기우너하는 하나의 제사같기도 하다. '미야자키'는 연필그림을 고집한다. 3D 애니메이션도 사용했지만, 되도록 아날로그스러운 편집을 했다. 파도가 물고기로 변하는 모습이라든지, 인면어가 찬란한 금빛 물고기로 솟아오르는 장면, 포뇨의 어머니인 바다의 신이 성난 바다를 잠잠케 하는 모습은 숨막히는 장관이다. 제우스의 금기를 어기고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준 프로메테우스처럼, 포뇨가 벌인 이 사건은 결국 사랑의 힘으로 한 마을을 치유하는 행위였다. 우울했던 노인들에게 희망을 주고 인간과 바다와의 전쟁을 멈추게 했다. 다시 말하면, 이 영화는 인어공주의 지브리식 리메이크였다. 그런데 이야기가 우리의 정서에 훨씬 더 깊게 공명했다. 아리엘의 아바 포세이돈 대신  포뇨의 엄마가 나온다. 여성성이 극대화된 바다의 모습은 디즈니의 마녀와는 차별화된 성스러움을 안겨주었고,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원작 인어공주의 서글픔 대신 인간으로 새출발하는 포뇨를 응원하면서 마무리한다. 예로부터 많은 고난과 슬픔을 겪은 우리는 반드시 이런 해피엔딩으로만 치유될 수 있다는 걸 '하야오' 감독은 알고 있었고, 이토록 생생한 스토리로 재생해 냈다. 또한 이 작품에는 남녀노소 모두가 등장한다. 그리고 연령에 구분없는 힐링이 펼쳐진다. 다리가 불편했던 노인들이 걷고 뛰며 해상재난으로 죽음의 문턱에 갔던 소스케의 아버지는 무사히 돌아오고, 외로왔던 소스케는 포뇨라는 친구를 얻게 된다. 이 모든 건 바로 소스케의 동심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 소스케는 포뇨가 금붕어일때도 인간으로 변하는 중간체일때도 그리고 인간으로 변했을 때에도 변함없는 마음으로 포뇨를 아껴주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건 바로 소스케의 동심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 자연과 펴오하를 노래하는 이 감독이 부디 오래오래 활동하기를 기원한다.